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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듣는다/이젠 그만 들을께

오펜바흐 - 쟈클린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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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NER THOMAS - "Jacqueline's Tears" (Jacques Offenbach)

 

 

 

 

Les Larmes de Jacqueline - Werner Thomas, cello

 

 

 

오펜바흐의 작품 "쟈클린의 눈물"

(Offenbach's Les larmes du Jacqueline)은 이 세상에서 애잔한 첼로 음으로서 인간의 가슴을 도려내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음악 중에 하나이다
이 곡에 대한 사연을 알고 들으면 더 이해가 되고 이곡으로 인한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말하면 한편의 인생 드라마를 연출할수 있을것 같고 그것을 성서의 밝은 빛 하에 비추어 보면 진귀한 교훈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여 필자가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이 곡을 사랑하여 이에 관한 자료를 모우고 연구해서 여기에 실어본다

쟈클린'이란 이름은 실제의 이름이다
쟈클린 뒤프레(Jacqueline du Pre1945~1987)는 영국옥스퍼드대학교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녀의 3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소리를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부모에게 첼로를 사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부모는 그녀의 4세때 자기키 보다 큰 첼로를 선물해 주었고 5세때부터 본격적으로 배운 그녀는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섭렵했다
16세가 되던 1961년 런던에서 공식 데뷔연주 무대를 가졌고 1965년엔 뉴욕에서 데뷔했다. 이후 세계적인 첼리스트로서 활약하기 시작하여 23세이던 1968년에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했고(바렌보임은 1942년 출생으로 당시 26세, 현재생존 66세) 그녀는 28세이던 1973년에 희귀병에 걸려 연주활동을 모두 중단했다
그 이후 14년동안 투병하던 그녀는 말로써 지도하는 마스터 클래스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가슴을 시리게 하는 매력의 선율이 흐느끼는 이 아름다운 첼로 독주곡은 42살의 젊은 나이에 타계한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Jacqueline du Pre)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곡으로 알려져 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펜바흐는 19세기 인물이고 자클린 뒤프레는 1945년도에 태어나서 1987년에 세상을 떠난 20세기의 인물이다
이 의문에 대한 진실은 베르너 토마스(Werner Thomas)라는 젊은 첼리스트가 오펜바흐 사후에 그의 미발표된 곡을 우연한 기회에 찾아내어 자클린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붙여 그녀에게 헌정하는 뜻으로 연주함으로 비로서 그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금세기 최고의 여성 첼리스트이며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에게 헌정 할수 있는 최고의 곡으로 우아하면서도 차분한 이 서정적인 소품을 온화하게 되살리는 베르너 토마스의 연주가 일품이라고 한다
이곡은 자클린 뒤프레의 생애를 알고 듣게 되면 더 애절하게 느낄수 있다
어릴 때부터 '거장급의 천재 소녀' '우아한 영국 장미'라는 칭송을 받은 천재 첼리스트인 그녀는 황금시기인 23세때 유태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사랑하여 결혼 하였으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28세 때부터 희귀병인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을 앓게 되자, 그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첼로로부터 사랑했던 남편에게서 마저도 버림을 받고 그녀 인생의 소중한 것은 죄다 상실과 소멸 그리고 이별하게 되어 다양한 슬픔을 겪으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비련의 첼리니스트 자클린 뒤프레는 몸이 굳어져 가면서 움직일수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도 명반으로 꼽히는 그녀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을 듣는것 뿐이었다고 한다
슬픈 이야기라서 그런지 들을수록 한없이 슬퍼지는 그러면서도 젖어드는 아름다움을 어쩌지 못하는것이 '자클린의 눈물'이다


이런 정황에 처했을 때 그녀의 남편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마음과 태도를 우리는 눈여겨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쟈클린에게 있어서 바렌보임과의 결혼은 음악적으로 좀 더 성숙할수 있었고 좀 더 많은 경험을 쌓을수 있도록 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혼 당시엔 무명한 유태인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을 하면서 그녀는 영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인지도를 보면 '영국장미'와 '사막의 선인장'과의 '결혼'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영국민으로부터 당사자들은 듣게 되었다


더구나 키도 훨씬 크고 아름다운 자클린이 곱슬머리 무명의 유태인 피아니스트와 결혼한다니 영국민의 실망과 반대는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라손 사랑에 눈 먼 사람들을 떼어 놓을수는 없었다
이런 연유에서 그런지 남편인 바렌보임의 영국민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않았으리라고 사료된다
동시에 병든 아내에 대한 남편의 냉대는 이 곡명이 말하는 "쟈클린의 눈물"을 흘릴 만한 이유가 내재하였다고 하겠다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생활에서 '다발성 경화증' 발병초기에 쟈클린 뒤프레는 아주 가끔씩 자신의 이런 증상을 남편에게 털어 놓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바렌보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바렌보임은 연주자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그녀의 연주가 필요했다
재키(그녀의 애칭)가 리허설이나 연습 때 자주 템포를 놓치게 되자 바렌보임은 그 때마다 쟈클린 뒤프레를 혹독하게 몰아붙이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그녀의 정신력이 해이해진 탓이라는 것이 바렌보임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쟈클린 뒤프레 역시 자신이 아픈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고 일주일에 5회씩 프로이트 학파의 정신 분석가인 월터 조피에게 진찰을 받으러 다녔다고 한다

 

그러는 중 그녀의 연주에 대한 악평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미치게 한다'고 했던 그녀의 연주는 차츰 '일관성도 논리성도 없는' 연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무서웠다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은 "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 이 잦았다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늦게 돌아올때 남편이 화를 내면 '쇼핑하다보니 입고 싶은 옷이 많았어요'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이상이 단편적이지만 바렌보임의 질책이 얼마나 심했으며 그녀 자신이 그로인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발병 초기에는 이 불쌍한 천재 첼리스트를 냉대와 질책을 했고 그녀의 긴 14년 투병기간 동안 남편인 바렌보임은 한 번도 따뜻한 병문안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냉혈한"이라고 혹평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즉 '쟈클린'의 남편인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 태생의 유대인이고 점차 세계적인 지휘자로, 명 피아니스트로 유명세를  탈 때의 일이었던 그 때였다고 한다
중동 문제(이스라엘. 에집트의 7일 전쟁 당시)를 음악과 예술로 풀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반유대주의자인 '바그너'의  오페라 ‘트란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이스라엘 심장부에서 공연하여 이스라엘 의회에서 탄핵까지 당한 용기와 소신의 행동하는 예술가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다니엘 바렌보임'의 정치적 소신과 음악적 천재성은 인정 하지만, 현실에서의 냉혹한 행동에 대해서  인간 윤리적인 면에서는 동의를 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이에 대한 다른 전기 작가들은 변명은 남편 바렌보임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바쁘다거나 그 병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쟈클린 뒤프레에게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고 차츰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쟈클린 뒤프레는 아무도 없는 밤중에 혼자 절망에 떨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와 달라고 조르곤 했다고 하니 그녀의 마지막 투병이 얼마나 고독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이 "쟈클린의 눈물"이 담긴 연관된 대략의 이야기이었다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