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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듣는다/세상을 듣는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Preludes op. 28, NO.15 빗방울 전주곡

 

 


 

'Fryderyk Franciszek Chopin'
'쇼팽' (1810-1849)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은 24곡이나 되는 많은 전주곡을 작곡했다.

전주곡(prelude)은 종교적 또는 세속적 음악 작품에 있어서 시작 또는

도입의 역할을 하는 악곡이다. 그러나 19세기 쇼팽, 리스트, 스트라빈스키,

드뷔시에게 서는 그 도입의 의의는 상실되고 전주곡은 사실상 독립된

악곡으로 형성되었다. 쇼팽의 전주곡은 독립된 악곡으로서의 대표적인 악곡이다]

 

쇼팽은 1810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가까운 젤라조바볼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쇼팽은 어린 때부터 피아노의 신동으로

소문나 7세 때 첫 작품을 쓰고 8세 때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1830년 스무살 때 세계 악단에서 활약하기 위해 바르샤바를 떠나

비엔나를 거쳐 파리에 간다 . 그 후 39세로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8년간 파리를 무대로 악단의 총아가 된다.

쇼팽은 파리에서 처녀 작가 조르주 상드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고

2년 뒤 마요르카 섬으로 상드와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난다.

 

리스트의 애인이던 다구 부인의 살롱에서 쇼팽과 상드는 처음 만난다.

그 때 나이 쇼팽는 26세 상드는 32세였다.

스페인령인 마요르카 섬은 발레아르 제도 중 가장 큰 섬으로

경치 좋고 기후 좋아 ‘지중해의 진주’라고 자랑하는 곳이다.

이 섬은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쇼팽과 상드는 1838년 만난 지 2년 만에 그 섬으로 떠날 때,

두 사람은 파리 사교계의 구설수에 올라 있었고,

쇼팽의 건강은 악화되어 요양을 겸한 여행이기도 했다.

쇼팽과 상드의 이 섬에서의 생활은 상드가 쓴

<마요르카에서의 한겨울>이란 책 속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두 사람은 팔마 시내에서 방을 구하지 못해

에스타블리멘츠라는 마을의 ‘손 벤트(바람의 집)’란 별장을 빌린다.

쇼팽이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어렵게 구한 방(일명 바람의 집)에서 조차 쫓겨난다.

그 후 15세기에 세워진 발데모사의 수도원으로 간다.

그 것도 몇 번을 옮겨가며 하게 된다.

 

어둡고 사나운 기후에 시달린 암울했던 수도원생활에서

쇼팽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이 암울한 생활 속에서 24곡의 전주곡을 작곡했다.

이 전주곡들은 이런 생활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그 시절

아름다운 시정과 강한 정열이 잘 함축된 쇼팽의 젊은 날의

영감의 기록이며 쇼팽의 “마요르카 일기”라 할 만한 작품들이다.

 

전주곡집 중에서 특히 널리 알려진 곡이 제15번 <빗방울>이다.

상드가 쇼팽이 죽은 후에 쓴 <내 생애의 역사>에

이 곡의 유래를 암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아픈 쇼팽을 수도원에 두고 상드가 아들을 데리고

물건을 사러 나갔다 오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급류가 범람했다.

홍수 속을 뚫고 가까스로 밤늦게 돌아왔더니 쇼팽은 상드가

위험에 빠진 상황을 상상하여 환각에 빠진 채 정신이 이상해져 있었다.

나중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 쇼팽은 자신이 호수에 빠져 있고

가슴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수도원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왼손 반주가 되풀이, 되풀이 A플랫 음을 두들기는 <빗방울>전주곡이

이 빗소리와 직접 관계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상드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 곡의 분위기와 일치하고 있다.

 

쇼팽과 상드는 1839년 2월 마요르카 섬을 떠났다.

그들의 이 여행은 상드가 인정한 것처럼 ‘완전한 실패’였다.

쇼팽의 건강은 출발 때보다 더 나빠져 있었다.

 

상드는 쇼팽에게 헌신적으로 시중을 들었고,

그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했다 .쇼팽의 창작 과정에 대해서는

상드가<내 생애의 역사>에 잘 기록해 놓고 있다.

1847년 쇼팽과 상드는 상드의 딸을 둘러싼 미묘한 감정 대립으로 헤어진다.

그들의 이별은 쇼팽의 심신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고 음악의 샘도 말라 버렸다.

 

상드와 헤어진 지 2년 후 1849년 10월17일 쇼팽은 죽었다.

파리의 페르 라제르 공동묘지에는 하얀 대리석 뮤즈상을

머리에 인 쇼팽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에 매장 될 때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던 날,

친구들이 기념으로 준 폴란드 땅의 흙이 관 위에 뿌려졌다.

유해는 거기 묻혔지만 쇼팽의 심장은 유언대로 고국에 보내져

바르샤바의 크라코프스키 체드메슈체 거리에 있는

성 십자가 교회에 황금 단지 속에 담긴 채 안치되었다.